<기고> 한기석 평화의 소녀상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올 1월초 정확히 1월 6일이다. 오전 11시경 눈을 뜨자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한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박영미 선생님, 얼굴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인데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박영미 선생님이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순간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가워 태전동 빵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것이 경기광주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의 첫 시발점이다.

만남을 가진 후 집에 와서 3년 전 일을 생각했다. ‘지지 않는 꽃’ 바로 프랑스 앙굴렘 만화 전시회에서 외교적 파장을 일으킨 사건, 그때 나눔의 집을 방문하면서 이곳 광주에서 전시회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지역 시민 단체나 정당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별 대답이 없자 고민 끝에 그래도 시민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슬픔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경남 창원 등 지역 전시회를 찾아갔고, 담당 공무원도 만나 얘기를 나누었으며 마지막 희망으로 한국 만화 연합회 문을 두드렸다. 

김병수 국내 전시회 단장으로 영등포역에서 만나 경기광주 지역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하자 놀라면서 지금껏 광주에 나눔의 집이 있지만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남한산성아트홀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홍보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었다. 

전시회 당시 많은 도움을 주신 설애경·소미순·박현철 시의원, 안병균 전 광주도시관리공사 사장과 임선주 남한산성아트홀 과장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때 일을 떠 올리면서 어쩌면 그보다 더 마음고생을 할텐데라는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내려졌다. 정말 내 자신이 진정 위안부 할머니들을 사랑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곳 광주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나라를 빼앗김으로서 특히 여성에게 닥치는 아픔을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함께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다짐을 했다.

그러한 결심이 서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가에 고민을 했고 일차적으로 지역 시민 단체에 소녀상 건립에 같이 해보자는 제안서를 보내면서 여러 단체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1월에 준비모임을 가졌으며 2월에 발대식과 함께 모금을 시작했다. 모든 일들이 그러 하듯이 진행하면서 겪는 생소함 그리고 당황스러움 속에서 일들이 진행되듯 우리 소녀상 추진위원회 또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중이다. 

이중에 3월 4일 첫 바자회 그리고 4월, 5월 이 지역에 중고생들이 주축이 된 길거리 모금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앞으로도 소녀상이 건립 될 때까지는 계속 모금하겠지만 이 학생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더욱 어려운 길을 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과 동시에 앞으로도 서로 마음을 맞추어 진행해 나가도록 다짐해본다.

끝으로 이곳 광주에 나눔의 집이 있어서 주변을 지나갈 때가 가끔 있다. 그때마다 진정 평화란 무엇인가? 물음표를 가지며 내 가슴속에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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