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남한산성면은 남동, 북동, 불당리, 광지원리, 엄미리 등을 합하여 만든 행정구역으로 광주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부면이라 하였다가 2015년 남한산성면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바뀌었다. 그 중 광지원리는 현재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하남시와 광주시의 교차로 인근 남한산성 입구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형이 완만한 구릉 지대이며, 광지원 초등학교가 위치한 ‘안말’, 길 건너 바깥에 위치하는 ‘바깥말’, 광지원교를 건너 섬처럼 떨어져 있는 ‘섬말’로 이루어져 있다. 광지원리는 조선시대 관리나 역마가 쉬던 황교원
설화란 집단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총칭으로 국내에서는 흔히 신화, 전설, 민담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곳 광주에는 지명 유래담, 자연물과 관련된 전설 등이 전해지는데 대개 역사적 인물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중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에 관한 흥미로운 설화 2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이를 소개한다.「서장대의 매바위 전설」은 남한산성 축조에 관한 전설로, 조선 인조는 광주유수로 있던 이서에게 남한산성 개축을 명한다. 이서는 이회와 승려 벽암에게 성을 나누어 쌓게 했다. 북쪽을 맡은 벽암은 일을 순조롭게 진행 시켜 기일 안에
수어장대는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남한산성 내 서쪽 주봉인 일장산(日長山) 정상(해발 453m)에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하며, 수어장대는 병자호란(1636) 때 인조가 군사를 이끌고 청 태종의 13만 대군에 대항하여 47일간 항전하던 곳이기도 하다.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
광주는 예로부터 경기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뜻에서 한자로 넓을 광(廣)자와 고을 주(州)자를 썼다고 한다.한강은 우리나라의 중앙부를 횡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서로 패권을 다투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강 유역을 점거한 나라는 번성하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였다.기자 조선의 마지막 군왕인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쫓기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가 한왕(韓王)이 되어 세운 회안국(淮安國)이 지금의 경안 일대이다.최근까지만 해도 경안리 장터에 회안교 다리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세천 복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이 이곳에 있어, 2015년 ‘중부면’이었던 행정구역명을 ‘남한산성면’으로 변경하고 현재에 이른다. 병자호란 전인 1600년대 초반 광주부를 광주 유수부로 승격시켜 남한산성 안에 행궁을 설치하고 유수부 관아를 옮겼다.1906년(대한제국 고종 44년)에는 광주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설치하였다. 이후 1917년 산성리에 있던 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은 300여년 동안 광주의 중심지였다. 그런 이유로 2015년 행정구역명 변경 전에는 이곳을 고을의 중심이라는 의미의 ‘중부면(中部面)’이라 불렀던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하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의 전설이 있다.이때 그가 남하하여 나라를 세운 회안국(淮安國)을 이곳 경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문헌상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회안(淮安)의 음은 한(韓)의 연장음으로서, 광주의 옛 이름에 한산(漢山,지금의 남한산)·한성(漢城, 지금의 남한산성)·한수(漢水)·한주(漢州)와 같이 ‘한’자가 계속 붙어온 것 역시 이 지역과 한(韓)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그전엔 경안동에 ‘회안교(淮安橋)라는 다리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온조왕은 백제의 시조로써 삼국유사에서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사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하였다.“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그는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유리 왕자를 태자로 삼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초월’읍(草月邑)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자연(草) 속 달(月)빛이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초(草)는 자연을 뜻하며, ‘월(月)’은 무갑산 정상에 떠오른 달을 뜻한다.달빛이 무갑산 정상을 비추면 달빛에 어우러진 무갑산의 전경이 너무 아름답다 하여 ‘초월(草月)’ 이라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또 하나 전해오는 구전으로는 초월읍의 지형이 마치 초승달 모양이라 하여 초승달을 뜻하는 ‘초월(初月)’이었다가 후에 ‘초월(草月)’로 바뀌었다고 한다.읍의 위치는 광주시 전체를 놓고 볼 때 시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광주의 대표적인 무갑산과 관산이 동
퇴촌면은 경기도 광주시의 면이다.퇴촌면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특히 태종 이방원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趙英茂)와 관련이 있다.그가 정계를 은퇴하여 옛 광주의 동쪽 마을인 광동리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호를 퇴촌(退村)이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조영무는 1338년 함경도 영흥군 출신의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이다.그는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최초의 무관 출신으로 정승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처음엔 이성계의 사병 중 하나였으나 그는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이성계의 눈에 들어 심복으로 활약하게
‘곤지암’읍은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2011년 실촌읍에서 곤지암읍으로 개칭되었다. ‘곤지암’은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묘소에 얽힌 전설에서 유래하며, 바위(岩. 암)곁에 커다란(昆. 곤) 연못(池. 지)이 있다는 의미이다.신립(1546∼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신립은 탄금대(충북 충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장 고니시의 수만명 왜군과 맞서 싸우다 강물에 빠져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전투에서 패한것이 얼마나 원통하
명산의 단풍에 비겨도 손색없는 남한산성만의 만산홍엽이 이번 주말부터 11월초까지 그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 남한산성의 가을 단풍 남한산성은 봄, 여름에는 아카시아와 벚꽃향기가 가득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진홍색 단풍과 높고 푸른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할 수 있다. 또한 산세가 온화하고 넉넉하여 가족이나 연인과 경치를 감상하며 걷기에 알맞고 서울도심지에서 멀지도 않아, 이 무렵이면 서울 등 인근 도시는 물론 전국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 중 명소이다. ▲
오랜 시간 백마산, 태화산, 무갑산, 문형산 등 많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광주시는 산의 맑은 정기를 이어받아 오고 있다. 광주시는 이렇듯 많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많은 산중에서 경화여고와 광주 고등학교를 자연의 정기로 감싸고 있는 칠사산에 있는 칠보사를 찾아가 보았다.칠사산은 큰골봉, 작은골봉, 절골봉, 관음봉, 수리봉, 큰절봉, 심령봉 등 7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 일곱 봉우리 하나 하나 마다 절이 있어 칠사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광주 시내 송정동에 위치한 칠사산은 찾아가기
광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로 손꼽히는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한 성으로 인조 4년 1624년에 축성(築城)하였으며 특히,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45일간 항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우리 선조들의 자취와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남한산성 내에서 현존하는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수어장대라 말할 수 있다.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인조 2년(1624) 단층으로 축조한 것은
동서울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하는 경안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 일상에서 탈출하고픈 사람들을 시원하고 평화로운 자연이 있는 10만평 규모의 금원 리조트가 반긴다.팔당호가 보이는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에 위치한 전 구림농원이 이제는 금원 리조트 농원으로 10일 수영장 개장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한다.이 곳 리조트에 관광객들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산책로. 푸르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시원하고 고요한 제주풍의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어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가져다 준다.또한 고요한 산책로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